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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0. 20世 〉24. <부정공>학생공휘윤석묘표(學生公諱潤錫墓表)
1. 문헌 목록 〉20. 20世 〉26. <부정공>향산공휘상효행장(香山公諱尙孝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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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부정공>통정대부부호군승가선대부공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공휘방호가장(通政大夫副護軍陞嘉善大夫工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公諱邦浩家狀)
通政大夫副護軍陞嘉善大夫工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公諱邦浩家狀 府君諱邦浩字應瑞吾家興於松京中葉受封玉川爲貫以檢校大將軍諱璋爲初祖三傳諱元吉號農隱諡忠獻封玉川君享武夷院生諱瑜號虔谷官副正以孝忠旌享謙川祠子崇文號竹村諡節愍官節度使同丙子六臣禍父子同日取義 贈兵曹判書命旌配食莊陵壇謙川祠 肅慕殿庭子哲山號龜川遵父敎並騈命 贈敎官表宅壇祠殿庭躋享備儀至諱宗元當 宣廟朝擧義勤王曾孫諱夏亨絃歌雲山至四世諱基賢號晩悟從性澤遊爲君子儒寔府君大父皇考諱鎭豊 贈經筵參贊官妣淑夫人光山金氏參議遇喆曾孫璐女以純廟乙酉正月三十日擧府君即第二房也性度寬仁稟質重厚九歲失恃哭號擗踊抱屍撫柩頓絶方甦見者不禁流涕冲年居制一如成人自後家業漸窘跲負米採薪殫誠竭力恆切傷哉之嘆而毅然自守不阿於世不求於人女三十二而有室勤儉制産孝友飭躬養親以誠事兄以敬愛弟亦友言溫氣和勤作有儀制行謹敏交人誠信內而家庭外而鄕黨長幼尊卑咸得歡心無不欽稱敎戒子姪必正義方維持門戶不墜先徽及遭外艱送終諸節葬祥之禮稱家無憾盖伯兄先逝於親在之日姪兒尙幼而攝幹主鬯故也撫育孤侄如子使成聘禮勗昇宗事 高宗壬寅以耆社恩階通政大夫副護軍後以不肖追恩陞嘉善大夫工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甲辰四月二十七日考終壽八十葬金谷村案山可藏峴寅坐操文相紼者殆數十百人配貞夫人木川張氏澋女忠毅公潤后婦德甚備有古女士行事舅極孝奉君子敬御卑幼有恩府君之奉先牖後實多助焉癸丑十一月二十二日卒距其戊戌十月二十九日生則享年七十六墓合封擧一男即不肖秉贇娶高靈申永求女孫寅燮暻燮竹山安圭捀濟州梁在瞻慶州鄭炳琪妻曾孫相魯相皛寅燮出相譔相識相徹景燮出餘幼不錄嗚呼府君之謝世玆爲二十餘載而德愛之遺在人者不沫人恆稱之曰賢吾某丈某公某叔某兄之之德之仁也於此可見府君平日所存之深所養之厚所行之敦也己矣又以行義見邑誌噫以若不肖蒙陋固滯未得揄揚於宿德名卿之鴻筆立顯後世是亦莫大之罪也奉此以爲立言君子采擇之資將有其日也歟 不肖孤 秉贇 謹狀 통정대부부호군승가선대부공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공휘방호가장(通政大夫副護軍陞嘉善大夫工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公諱邦浩家狀) 부군(府君)의 휘는 방호(邦浩)、 자(字)는 응서(應瑞)이다。 우리 집안은 송경(松京) 중엽 옥천군(玉川君)에 봉(封)함을 받아 그로 관(貫)을 하게 되었는데、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장(璋)이 바로 시조이다。 三대(三代) 지난뒤 원길(元吉) 호(號) 농은(農隱) 시(諡) 충헌(忠獻)은 옥천군(玉川君)에 봉(封)하고 무이원(武夷院)에 배향되었고、 그의 아들 유(瑜)는 호(號) 건곡(虔谷) 관(官) 부정(副正)인데 효충(孝忠)으로 정려(旌閭)를 받고 겸천사(謙川祠)에 배향되었고 그의 아들 숭문(崇文)은 호(號) 죽촌(竹村) 시(諡) 절민(節愍) 관(官) 절도사(節度使)인데 병자(丙子)년 육신(六臣)의 화(禍)때 부자가 같이 순절(殉節)하여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贈職) 받고 정려(旌閭)도 받았으나 장릉단(莊陵壇)、 겸천사(謙川祠)、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고 또 그의 아들 철산(哲山) 호(號) 귀천(龜川)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랏기에 나란히 목숨을 바쳐 교관(敎官)을 증직(贈職)받았고 그뒤 종원(宗元)은 선조(宣祖)때 의병을 일으켜 왜란에 나가 싸웠고 그의 증손 하형(夏亨)은 운산(雲山)에서 풍류로 노래하며 치민하였고 그의 사세(四世) 기현(基賢) 호(號) 만오(晚悟)는 성택(性澤)을 종유(從遊)하여 군자(君子) 유(儒)가 되었는데 부군(府君)의 대부(大父)이다。 황고(皇考) 진풍(鎭豊)은 증직(贈職)으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 되었으며 비(妣)는 숙부인(淑夫人) 광산김씨(光山金氏) 참의(參議) 우철(遇喆)의 증손 로(璐)의 딸인데 순조(純祖) 을유(一八二九)년 一월 三十일 둘째아들로 부군(府君)을 낳으셨다。 부군(府君)은 성품(性察)이 너그럽고 중후(重厚)했는데、 九세 때 어머니를 여위고 시체와 널을 붙들고 울부짖다가 까무라치기 까지하자 보는 이 또한 눈물을 금치못했다。 또한 어린 나이로 거상하기를 한결같이 어른과 같이하였다。 그뒤로 집안살림이 점점 궁핍해지자 몸소 쌀을 팔고 땔나무를 하는 등 정성을 다하는 반면 어머니를 모시지 못한 탄식에 눈물겨워했으나 마음 가짐을 굳세게 하여 세상에 아첨하거나 남에게 바라는 일이 없었고、 三二세에 장가들어 근검(勤儉)한 살림 방책과 효우(孝友)한 몸가짐으로 어버이 봉양할 때는 정성(精誠)을 다하고 형을 섬길 때는 공경을 다하며 동생에게는 역시 우애하여 언어와 기상이 온화하고 동작이 의표가 있으니 행동이 근민(謹敏)하고 사람을 사귈때 신의로 하니 안으로는 가정과 밖으로는 향당(鄕黨)에 이르기까지 장유존비(長幼尊卑)에 환심을 얻어 다같이 흠모(欽慕)하였다。 자질(子姪)을 정의(正義)의 방법으로 가르켜 문호를 유지하여 선조의 아름다움을 떨어트리지 말게하였고 부친의 상을 당하여 장사에 대한 모든일을 집안 형편에 따라 섭섭함이 없게하였는데 이는 백형(伯兄)이 부친 먼저 세상을 떠 버리고 조카들이 어려 몸소 일을 주관한 때문 이었다。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펴 장가까지 드려 종사(宗事)를 이어 가도록 힘썼다。 고종(高宗) 임인(一九○一)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을 받았고 그뒤 불초(不肖)로 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추가로 받았다。 갑진년 四월 二十七일 세상을 뜨니 八十을 사셨다。 금곡촌(金谷村) 안산(案山) 가장현(可藏峴) 인좌(寅坐)에 장사하였는데 만장(輓章)을 들고와 초상에 임한 자 수백 명이었다。 부인은 목천장씨(木川張氏) 경(澋)의 딸로 충의공(忠毅公) 윤(潤)의 후예이다。 부덕(婦德)을 갖추고 있는 반면 옛 여사(女士)의 행실도 닦아 시부모에게 효도를 남편에겐 공경을 아랫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베푸는등 부군(府君)의 선영을 받들고 후손을 가르치는데 실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계축년 十一월 二十二일에 세상을 떴는데 무술년 十월 二十九일 태어났으므로 나이는 七十六세 묘는 합봉이다。 一남을 두었는데 바로 불초(不肖) 병윤(秉贇)으로 고령(高靈) 신 영구(申永求)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손자는 요섭(寅燮)·경섭(暻燮)과 안 규봉(安圭捀)·양 재첨(梁在瞻)·정 병기(鄭炳琪) 처이고 증손(曾孫)은 상로(相魯)·상효(相皛)는 인섭(寅燮)이 낳았고 상선(相譔)·상식(相識)·상철(相徹)은 경섭(景燮)이 낳았고 나머지는 어려서 쓰지 않는다。 아! 부군(府君)이 세상을 떠나신지 二十여년이 되었건만 그분의 덕애가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어 항상 말하기를 『훌륭하신 우리 아무어른、 아무공、 아무형의 지극한 덕(德) 지극한 인(仁)』이라고 하니 이에 가히 부군(府君)의 평일 소존지심(所存之深)·소행지돈(所行之敦)을 보겠고 또 그분의 행의(行義)가 읍지(邑誌)에 보인다。 슬프다! 불초(不肖)가 몽매(蒙昧)하고 고루(固陋)하여 숙덕(宿德) 명경(名卿)의 훌륭한 붓을 얻어 후세에 내세우지 못하니 이것이 또한 자식된 막대한 죄이다。 이를 받들어 입언군자(立言君子)의 채택의 자료가 되게 하려니와 장차 그런 날이 있을는지! 不肖孤 秉贇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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